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일전쟁/오해와 편견 (문단 편집) ==== 미국이 원조에 소홀했던 사정 ==== 우선 미국은 유럽에서 [[나치 독일]]과 싸우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일본군과도 전세계의 모든 육지보다도 더 거대한 [[태평양]]의 서쪽 절반을 무대로 하여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원조에는 소홀했다. 그리고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대규모 물자를 보내주고 싶어도 루트 상의 문제로 인해 보내주지 못한 것도 있었다. 영국이야 영국 해군만으로도 제해권이 장악이 가능한 [[대서양]]만 건너면 되고[* 사실 이쪽도 말이 좋아 제해권 장악이지, 1942~1943년 동안은 [[유보트|망할 놈의 늑대 떼]] 때문에 쉴새없이 정신없이 30%에 육박하는 수송선이 두드려 맞고 가라앉았다.], 소련은 북대서양 항로를 통해 [[무르만스크]]로 가는 루트와 북태평양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루트[* 소련과 일본이 불가침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소련의 화물선만 이쪽으로 다녔고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 전투물자는 제외되었다. 운송량으로는 이 루트가 가장 많았다. 일본은 소련과 가능한 중립관계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안전한 편이었으나 미국의 잠수함이 피아식별을 잘못해서 소련 화물선을 격침한 일도 있었고, 일본 잠수함 I-180이 소련 화물선을 격침한 일도 있었다.], [[베링 해협]]을 지나는 루트, [[페르시아 만]]([[이란]]에서 [[아제르바이잔]]을 통한 루트)으로 건네주는 루트 등 많았는데, 중국에는 물자를 보내줄만 한 루트가 없었던 것이다. 중국에 물자를 보내주기 위해선 미국의 수송선단이 서태평양까지 와야 하는데 서태평양은 일본 해군이 이미 장악하고 있었고, 여기에 수송선단을 보내면 어떻게 될지는 말 할 필요도 없다. 또한 중국의 해안도시와 대만은 모두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대규모 선단을 보내도 하역할 만한 항구도 없었다. 이란에 물자를 하역한 후 이란과 소련 땅 중앙아시아, 신장 성, 간쑤 성을 거쳐 물자를 전달하는 방법도 있지만 하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육로로 빙빙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따라서 유일한 루트는 대서양을 건너고 [[인도양]]을 가로질러 영국령 인도에 물자를 하역한 후 거기서 육로를 통해 중국까지 보내는 방법 뿐이었는데, 인도양도 일본군의 공습을 받는데다가 독일 잠수함의 활동지였으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인도양에도 다수의 독일군 잠수함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연합군 수송선들을 격침하고 다녔다.[[https://en.wikipedia.org/wiki/Indian_Ocean_in_World_War_II|참고 바람]]] 거기다 버마를 통한 육로 수송도 [[남방작전]]으로 1942년에 일본군이 버마를 점령하면서 차단되었다. 그 이후로 미국이 중국에게 물자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인도에 물자를 보낸 다음 '''수송기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는데, 일부 항공기는 추락한 비행기들의 잔해를 따라서 항로를 잡은 적도 있다고 한다.운반할 수 있는 물자의 양도 적고 항공기용 연료의 경우 운반하는 수송기가 운반 중 사용하는 양이 심하면 50%에 육박하는 등 낭비도 심했다. 물론 버마 루트가 버마 탈환 이후 재개통되긴 했는데 그땐 이미 전쟁 끝나가던 시점인지라... 게다가 미국은 중국에 대한 지원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중국의 능력 자체를 의심했기 때문에 중국이 원조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도 난색을 표했고 중국에 이미 할당된 물자를 영국이 횡령하는 문제도 모른 척 하는 등[* 1942년 롬멜이 카이로로 진격하자 중국으로 향하던 물자들이 죄다 영국으로 빼돌려지기도 했다. 이 전투기는 무기대여법과 별개의 차관으로 받은 전투기였다!] 매우 차별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http://news.ifeng.com/history/shijieshi/special/nuomenkan/detail_2010_09/25/2625351_0.shtml|오히려 중일전쟁 당시, 중국의 최대 지원국은 미국이 아닌 소련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해당 기사에서도 소련이 대인배라서가 아니라 일본 견제용으로 지원했다고 원인을 밝힌다.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면 소련은 독일과 일본의 협동 공격을 받을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소련은 [[모스크바 전투]] 직전까지만 해도 일본이 독일과 편먹고 자국을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하였는데 일본을 막으라고 배치해둔 병력 40만 역시도 이 때문에 극동에만 묵혀있다가 겨우 [[리하르트 조르게|소련 스파이]]가 일본은 절대 소련을 공격 안 한다고 보내고서야 모스크바로 옮겨 배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